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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신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가 정말로 당신에게 가 닿을 수 있는 행위일까? 자기고백적인 말, 결국 내 말을 들어줄 상대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또 다른 나를 호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와 당신 사이를 횡단하려면, 나는 어떤 시선과 태도로 당신에게 다가가야 할까? 지금의 너는 나에 가까운 너이다. 너에 가까운 너, 타자 혹은 익명에 가까운 너에게 가 닿으려면. 나는 듣는다. 낯선 소리들을, 불편한 소리들을, 몸에 박히는 소리들을.
#3 나를 찌르는 소리 혹은 소음에 대해. 같은 듯 다른 자리를 맴돌고 있다. 어쩌면 우연의 마주침으로 보이는 소리들의 교차, 시선들의 교차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 그것을 포착해내는 일련의 움직임이 필요한 것일지 모르겠다. 말이라는 그릇에 담을 수 없는 상태들 상태 그 자체에 놓일 수 있도록, 명명하는 행위를 미룬다.
#8 먼 발치에서 작은 몸짓을 비튼다. 그 자리에는 '왜?’라는 질문이 남는다. 물음표를 부여잡는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 흔들거리지만 완전히 돌아서지는 않는. 상실을 상실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상태를 얼만큼 지속할 수 있을까?
#9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한 채 입 안 곳곳의 골짜기로 숨는다. 나는 어디로 향함으로써 다른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통증을 매개삼아 타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가능할까? 통증이 남긴 공터를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까? 누구의 고통이든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그 자체로 마주하며 관계를 맺는 행위는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질문과 듣기의 반복. 어떤 질문들을 가지고 길을 나설까? 당신의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나는 어떤 채비를 해야 할까? 당신의 고통에 다가간다. 몸에서 몸으로. 몸을 기울인다. 당신이 나에게 몸으로 건네는 말들을 몸으로 듣기 위해. 외면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억한다. 아주 조금씩 당신과의 거리를 좁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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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당신을 상상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을 포착하려면 어떤 사물과 동작과 소리가 필요할까? 당신을 맞이하기 위한 자리를 만들어 간다. 나의 소리를 비우고, 당신의 소리가 채워질 수 있도록. 당신의 소리에 맞물려 나의 움직임을 이어간다. 내가 수집하고 기록한 곳에 당신이 자리한다. (불협)화음. 어색한 조율. 어긋난 말들의 마주침. 메아리와 울림.
#5 당신은 어딘가로 가고 있다. 당신은 어딘가에 있다. 이 정적. 당신은 상상할 수 없다. 정적. 온 주위가 매우 고요하다. 그러한 정적. 그것은 끝이 없다. 공간을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광활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매우 고요한. 어떠한 몸부림도 없다. 그 자체가 그 자체로 전부이다. 다른 곳은 없다. 다른 시간은 생각할 수 없다. 시간을 확인할 필요가 없는 총체적인 시간. (Cha, T.H.K. Dictee(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1). pp. 50-51 번역.)
#6 당신은 안으로 움직이고 있다. 정적 속에서. 그것의 느림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움직임을 만든다. 잠시 멈춤들. 잠깐의 멈춤들은 거의 쉬지 않는다. 새로운 움직임, 오직 다음 움직임으로 연장되기 위한 마무리. 새로운 움직임으로의 연장인 멈춤들. 당신은 죽음이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억이 없는. 꿈이 없는.) 그 후에. 고요함의 두께 무게. 당신은 움직인다. 당신은 움직여지고 있다. 당신은 움직임이다. 분리할 수 없게. 정의할 수 없게. 분리할 수 없는 어휘들. 없음. 아무것도 없음. (Cha, T.H.K. Dictee(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1). pp. 50-51 번역.)
#10 당신과 맞댄 피부를 사이로 영원한 찰나의, 상실의 순간들이 벌어진다. 균열됨과 동시에 연결되는 끈적하고 촘촘한 점막들의 연속. 점막들은 상실과 연결의 틈을 끊임없이 메우고 벌린다. ‘나’와 ‘너’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나와 너’의 경계, 나와너의 경계, 나와너의경계. 경계가희미해진다. 희미해진 경계를 발판삼아 나는 너의 이야기에, 너의 고통에 어떻게 가닿을 수 있을까? 비워낸 나의 혹은 너의 자리에서 무엇을 마주할 수 있을까?

dear, you
#7 '당신/너'. 빈 자리. 상실된 자리. 너는 사라졌다. 나로부터, 나에게서. 나는 네가 남긴 흔적/흉터/상흔/자국을 어루만지며 너를 가늠한다. 너를 그리며 침잠한다. 어느덧 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간다. 너에 대한 기억이 참으로 선명했다. 지금 너의 자리는 짙푸르고 노랗게 흩날린다. 다시 봄이 오고 있다. 저녁이 되자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연속의 연속. 불연속의 연속. 발생한 파형은 소멸하지 않는다. 무한수열의 끝나지 않는 점들의 증폭. 너에 대한 기억. 발생했던 상실의 순간이 어딘가에 닿아 반사되고 굴절되어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 파장은 나를 통과한다. 나는 또 한 번 너를 상실한다.
#11 통증이 자리했던 공간에 무엇을 새로이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할 수 있을까? 나로 가득한 이야기가 서서히 와해된다. 위태롭고 두렵다. 허울을 벗은 나약한 몸이 드러난다. 나와 당신 사이의 두터운 막 앞에 선다. 그 몸은 진솔한가? 나와 너 사이 그 경계에 자리한 관계의 서사. 수많은 것들이 너가 된다. 잘 지냈으면 해. 나와 당신 사이에 스민 상흔들 사이사이에 아물어가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다.
#12 나는 당신과는 참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요. 어쩌면 참으로 비슷하고 다르게. 그간의 삶을 거리두고 바라보게 되는 시선들이 내 안에 하나 둘 자리를 잡기도 해요. 당신의 노동이 나의 자라난 몸 사이사이에 놓여 있어. 당신은 강인한 사람이죠. 나를 키워줘서 고마워요. 이제서야 나는 당신을 향해 몸을 굽혀요.

참고자료(필타)
고통 (사라 아메드(2004), 『감정의 문화정치』)
1장. 고통의 우연성
“세계통증연구학회는 고통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a)고통은 주관적이다. (b)고통은 기초적인 감각을 느끼는 사건보다 복합적이다. (c)고통의 경험은 감각을 경험하는 요소와 혐오감이 드는 상태가 서로 얽히는 일을 수반한다. (d)불쾌한 감각을 느끼는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고통의 경험에서 본질적인 부분이다.”(63)
“표면에 새겨진 인상은 느낌이 강화되면서 나타난 효과다. 나는 불편함(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감각이나 경련)을 느끼는 경우에야 내 몸에 표면이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불편한 느낌은 해석과 인식을 통해서 고통으로 전환되며(‘발가락이 아파!’) 일종의 판단이 된다(‘저 책상은 안 좋아!’). 어떤 감각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일(‘아파!’)에서 ‘안 좋아!’로, 다시 책상에서 ‘물러나는 일’로 이어지는 일)은 고통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과 몸이 맺는 관계를 재설정한다는 의미에서 신체적 공간의 재구성을 수반하기도 한다.”(66)
“고통의 감각은 몸을 재배열한다. 고통을 느끼는 몸은 움츠러들거나 몸서리치면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고, 몸의 여러 모습은 다양한 곳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고통의 경험은 몸을 [세계와]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겪는 몸을 다양한 몸이 이루는 세계와 연결한다.”(73)
“고통의 우연성은 다른 요소에 의존해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우연성은 접촉과도 연관된다. ‘우연contingency’이란 단어와 ‘접촉하다contact’라는 단어는 동일한 라틴어 단어 ‘contingere’를 어원으로 한다. 이 라틴어 단어는 ‘함께com’라는 뜻과 함께 ‘만지다tangere’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처럼 우연성은 타자와 ‘함께’ 있는 것, 타자를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존재의 사회성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애착이 반드시 사랑과 관계있는 것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타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와 접촉한다.”(73)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해석하는 일, 타자의 몸을 회복시킨다는 이유로 타자에게 공감하는 일은 폭력을 수반한다. 그러나 타자의 고통이 국가의 고통으로 전유되고 타자의 상처가 국가의 손상된 피부로 물신화되는 일에 대해 타자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을 듣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고통에 응답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89)
7장. 퀴어 느낌
“편안함은 몸과 몸이 서로 마주칠 때 발생하며, 이 마주침은 ‘푹 잠기는’ 느낌을 약속한다. 반면에 고통과 불편함은 몸의 표면을 몸으로서 다시 느끼도록 만든다. 편안하다는 것은 어디까지가 자신의 몸이고 어디서부터 세계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주어진 상황에서 마음 편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몸과 주변 상황이 딱 맞을 때, 혹은 주변 상황에 맞춤으로써 몸의 표면은 보이지 않게 된다. 표면이 사라지는 변화는 편안함을 느낄 때 몸이 공간으로, 공간이 몸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푹 잠기는 느낌은 솔기가 없는 공간, 몸과 몸의 ‘이음새’를 찾을 수 없는 공간과 관련이 있다.”(319)
“불편함은 길을 잃는 느낌을 뜻한다.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느낌, 어색하고 불안한 느낌이 드는 거이다. 나는 이 느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느낌과 소외감은 몸의 표면을 재빨리 의식하도록 한다. 특정한 몸에 의해 형성된 사회적 피부를 내가 살아낼 수 없을 때, 몸의 표면은 표면으로 나타난다.” (320)
“불편함은 단순히 선택이나 결정의 문제(“나는 어떤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거나 ‘확장하지’ 않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몸이 경험하는 느낌이다. … 만약 몸이 공간에 ‘푹 잠기는’ 데 실패하면, 다시 말해서 공간을 ‘퀴어하게 만든다’라고 할 수 있는 실패가 발생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328)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몸과 삶을 형성하는 과정에 끈질기게 작용하는 규범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편함은 동화나 저항의 문제가 아니라 규범을 다르게 살아내는 일에 관한 문제다.” (333)
8장. 페미니스트 애착
“고통에 관해 말하는 행동은 ‘우리’가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고통에 관한 서로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낸 ‘우리’는 한 가지 토대, 정체성,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물론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그러나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단일하지 않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372)
“우리가 타자의 고통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타자의 고통은 현재를 직조하는 실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가능한 만큼 있는 그대로 타자의 고통을 어루만진다. 타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 이들이 겪은 강렬한 고통을 마주하는 일, 이들의 타오르는 분노에 귀를 기울이는 일, 우리가 맞서고 있다고 생각하는 묻는 것으로 인해 놀라는 법을 배우는 일, 이 모든 노동을 통해서 ‘우리’가 탄생하고 애착이 만들어진다.”(403)
배치와 다운율 (애나 칭(2015), 『세계 끝의 버섯』)
“가장자리의 것들edges … 불안정성과 불확실성, 또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무언가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체계성의 중심을 이루는 것들이라면?”(51)
“살아 있는 것들은 저마다 계절에 따른 성장 맥박을 통해서, 일생 동안 행하는 생식 패턴을 통해서, 그리고 지리적 팽창을 통해서 세계를 재구축한다. 유기체들이 서로 도움을 청하고 함께 어우러져 풍경을 빚어내기에, 하나의 생물종 안에서도 복수의 시간-만들기time-making 프로젝트가 존재한다.”(53)
배치assemblage(56-58)
- 열린 모임gathering
- 의도치 않은 조율coordination 패턴이 발달
- 다운율polyphonic
- 다성음악polyphony: 자율적인 멜로디가 뒤얽히는 음악(예: 마드리갈, 푸가)
- 농업에서 다운율 배치
- 다성음악polyphony: 자율적인 멜로디가 뒤얽히는 음악(예: 마드리갈, 푸가)
- 존 케이지가 작곡한 짧은 퍼포먼스 곡들로 이루어진 <불확정성indeterminacy>이라는 시리즈에는 버섯과의 마주침을 기리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듣기 (김혜순(2017), 『여성, 시하다』)
「귀, 안으로의 무한」
“시인은 귀로 시를 쓴다. 시인은 말이 그친 곳에서 쓴다. 시인은 말할 줄 모르는 두 귀로 말 아닌 말을 쓴다. 귀가 하는 말, 그것이 시다. 시는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어서 신음, 한숨, 노래. 비명과 비슷하다. 이명과도 비슷하다. … 시인은 귀로 들어온 것을 구축해 귀로 쓴다. 육안으로 보이지도 않는 이미지를 실제의 내 귀로는 들을 수도 없는 ‘귓말’로 쓴다. 시인은 지금 여기에서 지금 여기의 사후를 쓴다. 시인은 마치 번개 뒤의 천둥처럼 번개 속에 있으면서 이미 천둥을 쓴다. 이데아를 두 번씩이나 모방해서 겨우 하는 짓이 다른 세계, 아무것도 아닌 세계, 부재의 세계를 읊어대는 자들.”
“귀는 어두운 방이다. 과거의 우물이다. 구멍이다. 내가 이승의 마지막에 도착하는 구덩이의 현현이다. 귀로 말한다는 말은 내 구멍을 뒤집어 말하기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귓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어두움이 차 있을 뿐. 그저 비어 있을 뿐, 그저 깊을 뿐. 이 깊고 텅빈 것에 대한 내밀한 몰입이 귀가 하는 말, 시 쓰기이다. 귀는 어머니의 자궁 속의 산도처럼 나선 달팽이형으로 구부러져 있다. 시는 그 깊은 것, 안으로 무한한, 여성적인 것을 말하게 한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말을 하게 한다. 그것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정서는 더 집중되고, 감정은 더 짙어지고, 이미지는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한다. 그것이 공기 중에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면 몸이 반응한다.”
“귀는 태아처럼 생겼다. 태아로 태어나 태아로 죽는 기관. 오죽하면 태아 가르강튀아가 정맥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가 귀에서 탄생한다고 했겠는가. 태아는 물속에 잠긴 고래처럼 듣는다. 나는 지금 나의 쌍태아를 두 손으로 덮어본다. 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는 참 시끄러웠다. … 그중에서도 한 번도 쉬지 않는 엄마의 맥박은 소리로 만든 나의 둥우리였을 거다. 나는 귀처럼 몸을 웅크리고 그 소리들을 오로지 듣고 또 들었을 거다. 몸 전체가 하나의 귀였을 거다. 어느 날 엄마의 그 소리들이 심장을 만들었을 거다. 쿵쿵 울리는 소리의 근원을 말이다. 나의 첫 태동을 만들었을 거다. 팔에서 뻗어나와 서로 갈라져 각각 이름이 다른 손가락 열 개를 만들었을 거다.”
“귀의 부속 기관들은 매우 작다. 귓속에 들어 있는 뼈들은 인간을 만들고 남은 뼈들을 주워다가. 장인의 골방에서 세공했을 법한 작은 것들이다. 그 작은 것이 크고 깊은 곳을 향한다. 그 작은 주머니 속에 집채보다 큰 소리가 깃든다. 약한 것 속에 엄청난 소리들이 깃든다. 속삭이는 소리, 꽃이 피는 소리, 꽃이 시드는 소리, 먼 곳에서 눈꺼풀을 닫는 소리, 붉은 소리, 푸른 소리, 무엇보다 누군가 울기 시작할 것 같은, 무언가 시작하기 전, 그 전의 소리 같은 그 작은 기미가 우주적인 세밀화를 우리 앞에 현현한다.”
「시인은 가라」
“나는 귀의 말을 받아 적는다. 그 시끄러운 침묵을.”
“잔상의 소립자들 … 영원히 다른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뻗어나가는 소립자의 운동을 생각한다. 경계 없는 그것들의 유동을 생각한다. 거울처럼 펼쳐져 침몰을 생중계하던 텔레비전을 끄고 잠들지 못하던 밤의 창밖에 가득히 몰려온 안개를 생각한다. 안개처럼 방 안을 감싸는 잔상의 소립자들을 생각한다. 그 소립자 하나하나의 폭발을 생각한다.”
“한국의 시인들에게 바다는 이제 은유의 대상이 아니다. 한국 시인들은 ‘바다’라는 은유의 창고를 잃어버렸다. 언어는 응고되었고, 시의 수수께끼는 굳어버렸다.”
“시는 헐떡이는 호흡으로, 혹은 끊어지도록 가녀린 호흡으로 가득 차 들끓는 유용지물에게서 부재를, 죽음을 길어 올린다. 시의 한가운데 구멍 뚫려 있는 자리, 장소 없는 장소가 시의 장소다. 시는 말들로 가득 차 있지만 텅 비어 있는, 바퀴의 중심 같은 장소를 모시고 있다. 시는 부재로 포착한 도 하나의 실재다. … 부재와 공백이 들어차 있을 시인의 장소에 검은 즙이 가득 들어찼다. … 가해의 그물에 매달린 줄도 모른 채 지금껏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 있었더란 말인가. … 시인은 지금 시인 안에서 너무 살아 있다. 시인이 시인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도래하는 타자로서의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 시인은 시인 자신의 비존재를 가동시키지 못하고 있다.”
“시인의 죽음이라는 부재의 왕국에 죽음으로 되살아오는 아이들의 함성. 시적 주체인 ‘내’가 죽어야만 들리는 침묵의 소리”
고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2020), 『G.H.에 따른 수난』)
“어쩌면 내게 일어난 그 일은, 이해였을지도 모른다. 사실이 되기 위해서 나는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머물러야 하고, 계속해서 이해하면 안 되는 입장이어야만 한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모든 이해는 투철한 ‘이해하지 못함'과 유사하다. 아니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모든 이해는 궁극적으로 투철한 ‘이해하지 못함'의 누설이다. 발견의 매 순간은 자기상실이다.”(18)
“내가 하게 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즉 말하기, 그래서 말해진 것의 남루함이 불러일으킬 엄청난 경악 속으로 나 자신을 밀어넣기. 그 말이 내 입 밖을 나오자마자, 나는 서둘러 이렇게 덧붙여야만 할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23)
“내 질문은, 만약 내게 질문이란 것이 있다면, ‘내가 누구인가'가 아니었다. ‘나는 어떤 사람들 사이에 있는가'였다. … 태어난 지 2분 만에, 나는 내 기원을 상실했다.”(36)
“텅 비고 조용한 시간 … 그 당시 내 목구멍의 통증을 나는 기억한다. … 내면에서 나온 말은 날개를 펄럭이며 입안으로 날아들었다. 말은 꺼내졌으나, 우리의 귀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녹아서 흐르는 빙하는 매우 큰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괄괄 소용돌이 치는 물살 한가운데서 우리의 입술이 움직이며 말을 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가 본 것은 입술의 움직임이 전부였고, 그 소리를 들은 건 아니었다. 우리는 상대편의 입술을 보았고, 그것이 말하는 것을 보았으니, 우리가 듣지 않았다는 건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오, 진정 신의 이름으로, 그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163)
“당신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나는 많은 말을 사용하게 된다, 오류는 나를 불가피하게 논쟁과 사색으로 이끈다. 하지만 내가 오류를 저지르지 않아서 오직 침묵이 우리 사이를 지배하게 되면, 당신과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을까? 표현 없음에 대해서 어떻게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196)
“아,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말하는 것은 소리의 잦아듦이다. 신에게 말하는 것은 가장 소리 없는 침묵이다. 사물에게 말하는 것은 무언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당신에게 슬픈 일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나는 말의 맛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 없는 말은 내게는 박탈만큼이나 아프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스스로 벗어나야 함을 안다. 사물을 건드리는 것은 중얼거림이다. 신과 대화하기 위해서 나는 아무 연관이 없는 음절들을 서로 이어붙여야 한다. 인간 이외의 요소를 상실했기 때문에 나는 궁핍에 처했다-인간이 된 이후로 나는 낙원에서 추방당했다. 소리가 없는 탈인간적인 오라토리오야말로 참된 기도이다.”(222)
“‘생각에서 생각으로'가 아니라 ‘무드에서 무드로' 이동할 것이다. 우리는 탈인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이다. 존재는 인간을 초월한다. 인간으로 존재함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억지로 만들어졌다.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이 알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총체이며, 우리가 갈망하는 진실된 인간화일 것이라고 느낀다. 그러니까 나는, 죽음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다, 나는 삶을 말하고 있다. 삶은 행복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닿음의 상태이다.”(238)
“추락하기 위해서는 일단 정상까지 힘들게 기어올라가야만 하니까-총체적인 언어를 완전히 구축한 다음에야 비로소 침묵이라는 탈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마침내 쇠퇴할 그 지점까지 상승하기 위해서 나는 내 문명이 반드시 필요했다. 오직 목소리의 불가능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침묵과 타인의 침묵, 그리고 사물의 침묵을 듣고 그것을 가능한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 본성이 인정된다. 고통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끔찍한 고뇌와 더불어, 그리고 우리의 조건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인정된다. 다른 것이 아닌 오직 그것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므로. 또한 조건을 사는 것이 곧 우리의 수난이기 때문에. 인간의 조건은 그리스도의 수난이기 때문에. 아, 그러나 마침내 소리 없음에 도달하기까지 목소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내 목소리는 현실을 찾아가는 길이다. 현실은 … 내 언어에 앞서서 존재한다. 현실은 그것을 찾는 목소리에 선행한다. 내가 표기하는 정도만큼 나는 소유한다-이것이 언어를 갖는 영예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내가 표기하지 못하는 정도까지도 소유한다. … 언어는 인간인 나 자신의 노력이다. 내 운명은 찾아 나서는 것이고, 내 운명은 그리하여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갖고 돌아온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내 언어의 실패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오직 구조가 무너질 때만이, 달성할 수 없는 것을 얻는다.”(243)